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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희생양인가. 권력욕에 눈이 먼 희대의 정치가인가. 흥선 대원군하면 떠올리게 되는 질문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흥선 대원군을 쇄국의 원흉, 혹은 아들의 권력을 탐한 시대의식에 눈 먼 인물, 그도 아님 왕권을 볼모로 한 바탕 권력 도박을 감행한 야심가 정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운현궁의 아침 해가 밝았다. 신열이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투명해졌다. 유난히 짙은 새벽안개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시야는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

믿기 힘들 정도의 강한 오한이 계속되고 있다. 몸 전체에 신열이 가득했다. 안사랑 방구들에서 가혹한 냉기가 올라오고 있다. 분명 등허리는 뜨거웠다.

“머리는.” “마리라고 하죠.” “약은?” “허리는?” “요부.” “어머니는?” “어마마마.” 손자 준용(조선 왕조의 왕족. 흥선 대원군의 손자. 김홍집 내각의 내부협판·통위사에 등용됨)의 답변엔 막힘이 없었다.

고립된 산야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다. 그야말로 고립무원, 창살 없는 감옥이 되어 버린 셈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민씨 척족들의 나를 향한, 왕부의 노욕에 대한 짐작과 경계는 분명 그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비극의 모순이 나의 등장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식의 극적인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혹감을 넘어선 비애의 감흥이 가슴속을 아리게 후비고 지나간다. 천일의 유폐를 마친 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선으로 향했다.

우려했던 염려, 저들의 은밀한 속내는 끝내 현실이 되었다. 모르진 않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저들이 혹여 절대적으로 순수한 이웃 국가에 있던 왕의 아버지를 대우하는 극진함으로 되돌아섰을지도

일천여 일의 침묵과 고독이 내게 안겨다 준 것은 분노의 소멸이었다. 그것은 다르게 설명해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환희도 결여된 상태로의 몰입. 나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었다.

육백 일, 칠백 일. 이 지독한 전망 없음의 미래 속에서 <고왕경>은 이미 단어들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화선지 위에 그려지는 난(蘭)의 활기조차 아무 감흥 없이 무채색 제단 위에 올라설 즈음, 나는 자리에 눕는 시간을 확장해 갔다.

<고왕경>(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내용으로 구성된 경전)을 읽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처음엔 내적인 기율에 따라 행동했다. 비록 포로의 몸으로 끌려오긴 했지만 나의 몸은 조선의 몸일 수밖에 없다. 그건 아들 명복이 자신의 왕됨을 거부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